저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시절 할아버지가 산에 숨어 살던 집에서 1930년에 태어났습니다.
저의7남매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마리아입니다. 산 위에 있는 저희 집에서는 나가사키 항구가 잘 보여서 배가 오고 가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8월9일 언니만 점심을 먹고, 저는 음식을 말리고 있을 때 원폭을 당했습니다. 집은 기울어졌고 음식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놀랐고, 밤이 될 때까지 아무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친척이 우라카미 제일병원(현재의 프란치스코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가 보라고 하여
갔습니다. 요셉 수사님(작은형제회)과 함께 밭을 경작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미국에서 선교 오신 수녀님을 만났는데 “수녀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상의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허락해 주셨지만 아버지는 하룻밤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은 수녀가 되도 좋겠다” 라고 말씀하시며 허락해 주셨습니다.
2013년에 서원 60주년 축하식을 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수련기는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영어를 모르고, 수련장님은 일본어를 모르셨습니다. 수업할 때는 사전을 한 손에 들고 공부했습니다. 수업 때 칠판에 쓰는 영어 철자를 잘 몰라 여러가지 우스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웃음을 멈출 수 없고, 기도도 되지 않아 수련장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저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처럼 자연을 사랑합니다. 꽃이나 야채를 심어 자매들이 “예쁘다”, “맛있다” 라는 말을 해주면 즐거웠습니다.
저의 사도직은 거의 성당 담당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가꾼 꽃으로 제단 앞에 꽃꽂이를 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느끼면서 기꺼이 일했습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었어도… 매일 밭에 나가, 햇빛을 많이 쬐고 꽃, 야채와 대화를 하며, 기도 안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연락
그 한 걸음이 당신의 새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수녀로서의 삶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중요한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견학이나 대화의 기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성프란치스코병원수녀회 총본부
히메지 성마리아병원
개호노인보건시설 마리아빌라
중증장애종합지원센터 루르드